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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edrich Becker의 작품 세계

by Kwanghun Hyun posted Jun 1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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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논총원고)






Fridrich Becker의 작품 세계 
(The Works of Fridrich Becker)






전용일/공예미술학과 부교수
Jeon, Yong-il / Associate professor, Dept. of crafts




















Fridrich Becker의 작품 세계 


전용일/공예미술학과 부교수


목차

Ⅰ. 서론
Ⅱ. 배경
Ⅲ. 생애와 활동
Ⅳ. 작품 세계
1. 장신구 미학
2. 가변장신구
3. 키네틱 장신구
4. 키네틱 조각
Ⅴ. 결론



Ⅰ. 서론

프리드리히 베커(1922-97)는 20세기 후반에 활동한 독일의 금속공예가로서 동시대와 이후의 세공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장신구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는 키네틱 주어리의 창시자이며 키네틱 조각가, 디자이너였다. 또한 뒤셀도르프 대학의 세공과정 교수로 교육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어린 시절부터 세공기술과 공학기술을 습득한 그는 50년대부터 장신구와 스톤 세팅 디자인을 개발하면서 모더니즘 미학을 작업을 통해 실천했다. 보석을 바꾸어 끼울 수 있도록 고안하여 이로부터 ‘가변적인 장신구’를 발전시켰는데 이것는 구성요소들의 순서바꾸기를 통해 착용자가 디자인 프로세스 속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가변적 장신구는 60대년의 키네틱 작품의 전개로 이어졌다. 베커는 장신구에 움직임이라는 4차원의 세계를 끌어들인 첫 작가다. 같은 주제에 의해 장신구 작업와 동시에 키네틱 조각을 병행하기도 했다. 스케일에서 서로 극단적인 장신구와 조각을 병행한 점도 매우 특이하다. 많은 작업에서 ‘효시적인’ 아이디어들을 창출했으며 동일 주제의 다양한 전개에서도 뛰어나 다능력의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획득했다. 

공예가로서의 베커는 주변의 많은 사물들에서 저질의 것과 기술 부족을 보면서 장신구나 디자인들은 반드시 아름다움beauty, 합리성 reason, 사물의 질서order of thing에 봉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Rüdiger Joppien, "Not everyone's jewellery", Fridrich Becker-Schumuck, Kinetic, Object, Arnordsche, Stuttgart,1997, 34쪽
그는 추하고 못 만든 것들과 표절을 혐오했으며 미에 대한 그의 신념을 평생동안 장인적인 작업을 통해 실천했다. 말년에는 형태의 변화가 특히 필요하다고 느낀 상컵과 상패등의 디자인의 개선에도 힘썼다.


Ⅱ. 배경

1940, 50년대의 전세계의 미술계는 미국의 추상표현주의가 압도했다. 예술가들은 모두 스스로 전통의 속박으로부터 세계를 구하는 선구자라고 생각했으며 이는 공예와 디자인에도 영향을 주었다. 
공예는 소위 스튜디오 공예Studio Crafts라 불리우는 작업 유형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공예가가 디자인과 제작을 모두 담당하면서, 단일의, 손으로 만든 ‘미술작품’을 만드는 일이었다. 미국과 호주, 영국 등의 나라에서 이 스튜디오 크라프트의 교육은 과거의 기술중심의 공예교육을 대체하면서 주요 커리큘럼이 되었으며 ‘장신구제작’은 표현적 예술 형식으로의 역할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독일과 프랑스에서 도제 제도apprenticeship의 전통은 강하게 남아 있었으며 공예가의 ‘기술’은 여전히 중요시되었다. 독일의 대학들에서는 전통을 중시하는 엄격한 기술교육과정을 창작 교육만큼 중요시했고, 많은 교육자들 스스로가 뛰어난 장인들이었다. 뮨헨 아카데미의 윙어Herman Jünger, 뉴렌베르크 아카데미의 훼슬레Erhard Hüssle, 포르츠하임대학의 라일링 Reinhold Reiling, 뒤셀도르프 대학의 베커등이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라일링은 조각가engraver로서, 베커는 세공사로서 전형적인 도제식 훈련받았던 사람이다.
한편, 독일 바우하우스의 교육과 모더니즘 디자인의 확장은 이 학교의 폐쇄 1933년 나치에 의해 Dessau에 있던 학교 폐쇄.
이후에도 수십년 동안 유럽 전역의 조형 예술계에 영향력을 가졌다. 유럽의 많은 예술교육 기관과 디자이너들에게 이것은 보편적이고 이성적이며 단순한 아름다움을 위한 형태의 추구를 독려했다. 이것은 여러 이론에도 불구하고 70년대까지 전 유럽에 영향을 주었다.

베커에 있어서 모더니즘과 미니멀리즘이 작업의 배경이라 한다면 키네틱 아트의 동향은 직접적인 관련을 갖는다.
‘사람들은 이제 인식한다. 태양은 돌며 그림자들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사람들은 계속 이동한다. 그러므로 시점도 변하고 시선도 변한다. 작품의 효과는 마치 영화와 같다. 수없이 쪼개진 순간들의 연속인 것이다.’ 1966년 홀란드 건축가이며 바우하우스의 교수였던 스탬Mart Stam이 20년대의 현상을 두고 한 말이다. Beate Christiane Arnold, "Object by Fridich Becker", Fridrich Becker-Schumuck, Kinetic, Object, Arnordsche, Stuttgart,1997, 230쪽

1922년 모올리 나기Moholy-Nagy와 케메디Afred Kemedy는 그들의 키네틱 조각의 선언에서 이렇게 말했다. ‘동적인, 구성적인 힘의 체계는 관람자들을 그 작업의 발전에 능동적인 요인이 되도록 요구한다’ Arnold, 앞의 글, 240쪽
이러한 생각은 50년대말과 60년대 초 키네틱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전유럽의 많은 예술가들 그룹에 영향을 주었다. 독일에서는 ZERO 그룹이 특히 알려졌으며 이태리에서는 ‘Gruppo N’과 ‘Gruppo T’, 홀란드에서는 ‘N’, 프랑스에서는 ‘GRAV’가 그러했다. 60년대에는 대형 전시회들을 통해 그들의 아이디어를 알렸다. 
1972년 홀쯔Hans Heinz Holz는 키네틱 아트의 본질은 ‘미술작품이 관람자에 의해 변경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관람자가 시점을 이동하면서 혹은 빛의 변화에 이해 이루어지는 지각상의 변화일수 도 있으며, 또는 수동적 조작이나 기계적 작동에 의해 작품의 부분이 바뀌거나 재조립되는 경우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다.'라고 했다. Arnold, 앞의 글, 240쪽

‘우리는 (물리적) 매스를 거부한다‘. 1920년 가보와 페브스너는 그들의 Realistic Manifesto 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모올리 나기는 1929년 이에 덧붙인다. ’매스를 해체하는 것으로 나아간 것이 키네틱이다. 그곳에서 볼륨은 가상적인 virtual인 것이다. 그는 볼퓸을 구분했다. 하나는 무게를 잴수 있고 3차원적으로 만질 수 있는 볼륨과, 단지 시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고 운동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가상의 볼륨, 그리하여 몸체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3차원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그래서 매우 중요한 디자인 요소가 되는 것을 말한다.‘ Arnold, 앞의 글, 245쪽


뒤셀도르프에 근거를 두었던 프리드리히 베커는 생애 동안 이 도시의 다른 예술가들과교분을 가졌으며 이 도시의 많은 문화적 이벤트와 교감했다. 자주 쉬멜라 갤러리Alfred Schmela Gallery의 전시회 행사에 참석했다. 이 곳에서는 클라인Yves Klein, 타피에스 Antoni Tapies, 프란시스Sam Francis, 팅구엘리Jean Tinguely, 폰타나Lucio Fontana, 아르망Arman, 크리스또Christo, 보이스Joseph Beuys 등의 거장들이 독일에서의 첫 전시회를 갖기도 했으며, 베커를 포함한 많은 뒤셀도르프 작가들의 전시회를 개최 되었다 Schmela의 죽음으로 이것은 끝났지만 그가 베커의 장신구들을 소장하고 있는 점을 보아서도 높이 평가했던 점은 분명하다. 
. 
특히 기계 장치를 좋아했던 베커의 관심을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은 모터를 단 괴물 같았던 모빌 조각을 출품했던 팅구엘리, 그리고 1959년의 피엔트Otto Piene의 빛과 움직임을 표현한 작업 들이다. 또한 뒤셀도르프의 ZERO그룹의 작업 역시 그에게 중요했다. 
이 그룹은 자신들을 가르켜 미술에서의 새 출발이며 타쉬즘Tachisme, 앵포르맬, 신표현주의와의 결별이라고 했다. 그들은 새로운 재료에서의, 구조에서의, 움직임과 빛에서의 새로운 시를 창조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들의 많은 작업은 관람자가 참가해 작동해 볼 수 있다. 또한 시지각적인 움직임, 또는 움직임으로 인한 빛의 변화가 포함된다. 그리하여 손의 작동으로나 혹은 시각적인 지각으로나 관람자는 작품속에 포함되어 일정한 시각 기간 동안 작품을 따라가게 되는 것이다. 
키네틱 작가였던 베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기계적 장치를 주관적인 제스춰를 극복하기 위해 사용한다. 이들을 객관적 물체로 해방시키기 위해 사용한다.' Joppien, 전의 글, 29쪽
놀이, 참가, 새로운 미학적 지식에 대한 탐구, 움직임이라는 현상 속에 내재하는 자유등이 예술가들이 실현하기를 원했던 실험적인 작업의 일부였다. 역시 엔지니어로 출발했던 콜더Alexander Calder의 작업으로부터 베커는 배웠으며, 콜더의 친구였던 리키George Ricky의 작업 베커는 1962년 뒤셀도르프 미술협회Society of Art에서 개최했던 Rickey의 스텐 전시회를 보았을 것이다. 리키 역시 가끔 장신구를 제작했다. 
, 그리고 키네틱 조각의 발명자인 카보Naum Gabo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키네틱 아트는 어떤 모습으로든 1960년대의 세계적인 경향이 되었으며 갤러리와 미술관의 주목을 받았고 카타로그와 저널에 쓰여졌다.


Ⅲ. 활동

프리드리히 베커는 1922년 독일 하겐Hagen근처의 엔데Ende에서 출생했으며 자우얼란트Sauerland의 그레벤슈타인Grevenstein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철 작업wrought iron 주로 단조(망치질)에 의해 이루어지는 철작업들. 난간, 손잡이, 문, 창틀 등등.
의 숙련된 공예가였다. 그는 또한 집안에서 물려온 여인숙을 운영했다. 
후에 베커는 어린 시절을 행복히게 묘사했다. 6세때 아버지 공방에서 얻은 스쿠루, 너트, 튜브들로서 엄마를 위한 장신구를 만든 적도 있다. 금속에 대한 열정은 어린 시절부터 자랐고 곧 자리를 잡아 갔다. 그는 엔지니어가 되고 싶었다.
14세때 학교를 떠났으나 동네에서는 도제 과정apprenticeship을 밟을 기회가 없었다. 뒤셀도르프시의 친분이 있는 한 가정에서 하숙을 하며 보르지크Rheinmetall Borsig사에서 기계공으로 수련과정을 가졌다. 그리고 공구제작자, 엔진 정비공으로 일했다. 이 시기는 웨스트팔리아에서 온 이 소년에게 고향 생각이 나게하는 고달픈 시기였다. 그는 선반에 손가락 하나를 잃기도 하였다. 이후 직인Jouneyman 도제徒弟 과정을 마친 초보 장인匠人
시험을 우수하게 통과했고 1939년부터 공학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그라인더 조정사로서 항공술 엔지니어를 선택했고 바이셀Weichsel의 토른 기술대학Thorn Technical College에 다녔다. 2년 공부를 마치자 루프트바페Luftwaffe 나치 정권하의 독일 공군
에 징집되었다. 그는 러시아로, 이태리로 마지막으로 오스트리아로 보내졌다. 훈장도 받고 여러번 부상도 입은 후 1945년 미군 감옥소에 수용되었으나 다리 부상으로 곧 석방되었다. 
귀향했을 때 그는 다리 부상으로 인해 앉아서 할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해야 만 했다. 처음에는 치과기술을 배었다. 일년동안 치과기술자로 일 했으나 세공으로 바꾸었다. 항공기술자였던 베커는 1947년부터 직업 세공가로 돌아선 것이다.

베커는 이제론Iserlohn의 세공가였던 크라우제 Krause에게 세공기술을 배웠다. 1948년에는 직인journeyman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같은 해 본격적인 세공공부를 위해 두 번째로 뒤셀도르프로 향했으며 뒤셀도르프 기술대학Werkkünstschule Dusseldorf에서 수학했다. 한 달에 40마르크의 전쟁 연금으로 공부를 했다. 그곳에는 표현 형식과 조형개념을 가르쳤으며 그의 가장 중요한 스승이 되었던 숄마이어Karl Schollmayer를 비롯하여 다보Thomas Dawo, 쿤클러Herman Kunkler등의 뛰어난 교수들이 있었다.
1951년 베커는 성작聖爵을 제작함으로써 직인 시험에 통과해 졸업했다. 1년 후 그는 마스터 시험에도 통과되었다. 숄마이어는 그의 재능을 일찍부터 알고 후에까지 도와주었으며 조교 자리도 수락했다. 베커는 얼마 안되어 뮈렌街Mühlenstrasse에 작은 공방을 시작했다. 마침내 1956년 숄마이어가 포르츠하임의 장신구 대학으로 자리를 옮길 때 그는 후임으로 베커를 추천했다. 1964년에는 금속공예과정의 주임교수Head가 되었다. 
베커는 아직 특정 분야보다는 세공과 은기를 함께 다루었던 세대의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직인 시험을 위한 작업은 반지였고 기술대학에서의 시험은 성작이었다. 그는 모든 장신구 제작과 보석 세팅 작업에 능숙했으며 똑같이 레이징이나 체이싱 작업도 능란했다. 그의 목표는 학생들에게 자신이 했던 것을 전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공가들이 모든 도전에 맞설 수 있는 다방면의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이것은 여러 종류의 외부로부터의 주문작업에 그들이 대처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교회로부터의 커미션 작업이 그것이다. 2차 대전 후 많은 교회가 재건축과 함께 새로운 제단祭壇과 종교적 상징물들의 디자인과 제작을 원했다. 이들 중 Rhineland-Westphalia, Aix-la-Chapelle, Münster, Wuppertal, Cologne와 Düsseldorf의 주요 도시들의 교회들이 포함된다. 이곳에 성작聖爵chalice, 성체현시대聖體顯示臺monstrance, 십자가, 감실龕室 등등이 요구되었다. 사람들은 수십년 동안의 판에 박힌 전통 형태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12년 동안의 민족 사회주의National Socialism을 겪은 이후 50년대의 사람들은 변화를 요구했던 것이다. 그들은 장식들을 거부했다. 장식의 스타일이 아닌 신앙 메시지를 담은 정신의 표현을 요구했던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새롭고 모던한 작업들을 수용했다.결과적으로 이 교회 성물聖物의 영역은 당시 새로운 젊은 세공가들이 새로운 형태로 실험을 할 수 있는 영역이 되었다. 베커는 당시의 컨템퍼러리한 미감을 성물들에 적용하고자 했으며, 모던한 형태에 대한 실험과 성물의 새로운 디자인이라는 두가지 목적을 합치시키고자 했다. 트리에Trier의 수도원에 있는 성체현시대 (1959)는 좋은 예다. 성체의 정신과 12사도를 상징하는 수정 바 형태로 복음의 퍼져나감을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스타일의 권위와 단순성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도1) 베커의 성물제작에 있어서 Aix-la-Chapelle의 금속공예가였던 슈베르트Fritw Schwerdt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건축가 슈바르쯔Rudolf Schwarz와 함께 30년대의 교회에 모던하고 엄격한 스타일이 조형세계를 보여주었던 사람이다. 

그밖에 50년대와 60년대의 성작과 성체 현시대들이 베커의 의도를 보여주는 좋은 예들로 남아있다. 1961년에 레버쿠젠에서의 첫 개인전에서도 성물들은 중요한 부분으로 다루어졌다. 

베커는 1958년 오베르카셀의Oberkassel의 집으로 이사하며서 직인과 견습생이 같이 일할 수 있는 많은 방들을 둔 지하의 큰 작업실을 꾸몄다. 그들과 함께 새로운 형태들을 본격적으로 다루 수 있었다. 
그는 이른 아침을 가장 좋아했고 한다. 먼저 머리로 생각하고 다음 종이를 통해 생각을 풀어냈다. 디자인을 정할 때까지 그는 오래 망설이지만 일단 정하면 완전한 세부표현과 치수가 기입된 정밀한 드로윙을 마치 ‘주어리공학자jewellery engineer’처럼 그린다. 이것은 큰 조각을 할 때나 반지를 만들 때나 같다. 그는 기술적 어휘에 대한 관심과 지구력을 가지고 있다. 공예적 관점에서 가장 어려운 재료라 할 수 있는 스테인리스 스틸의 정복(특히 작은 장신구에서)은 좋은 예다. 
1952년 그는 가변적 형태의 팔찌를 발전시켰다. 1956년에는 ‘two-way ring'을 창안했다. 팔찌와 반지는 50년대 내내 그를 사로 잡았다. 58년 경 이 주제를 더 체계적으로 심도있게 했는데 커다란 카보숀 형태 혹은 기하형태의 돌들의 사용했고 밑에는 탄성이 있는 발을 첨가하였다. 이것은 장식을 위한 장신구가 아니라 하나의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베즐은 돌을 붙들고 있는 맨 위부분에서 열린다. 돌들은 일반적인 방식으로 커팅된 것이 아니라 구형이나 실린더 형, 렌즈형태, 다면체 등으로 디자인된 것이다. 
이 형태들의 돌들은 일반 시장에서 구입할 수 없으므로 오베르스타인Idar-Oberstein에서 제작되었다. 이들의 크기나 결합은 반지들을 독특한 모뉴멘트처럼 보이게 했다. 흥미있는 점은 돌들이 바꿔끼워질 수 있는 점이다. 돌과 색의 선택이 열려져 있는 점이다. 다양성에 대한 베커의 취향을 보여주는 초기의 예들이라 할 수 있다. 

미적인 것과 함께 기술적인, 기능적인, 공학적인 것에 대한 베커의 관심과 전문성은 자연적으로 그를 산업디자인의 세계로 이끌었다. 당시 디자이너를 고용하지 못했던 대부분 산업체들로부터 계속된 주문이 있었다. 학교로도 많은 커미션이 왔다. 1860년 전후의 금속전공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일들, 장신구제작, 개인 고객들을 위한 여러 기물, 교회 성물, 테이블웨어 주방용품들, 조명등과 안경 등등의 디자인과 제작 주문을 맞았으며 이를 해결해야만 했다 이런 상황은 함부르크 미술대학의 튐펠Wolfgang Tümpel 이나 슈베비쉬케뮨트 주립 기술대학의 디타르트Karl Dittert에게도 동일했다.
. 
산업디자인에 대한 공예의 중요성에 대해 많은 논쟁도 있었다. - 즉 공예가 디자인을 위한 중요한 과정인가 아닌가 하는- 그러나 이 논쟁들은 당시 공예교육에서 어떤 전문화도 이루어지기 전 상태였다. 학교들이 시대를 따라가고 산업으로부터의 커미션을 놓치지 않으려면 그때그때 산업과 타협해야만 했다. 그리고 능률적인 생산기술과 새로운 재료들(예를 들면 플라스틱, 아크릴릭이나 철등) 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와 맞서야 했다. 

베커의 60년대 초기의 디자인 작업들은 이점에서 매우 치열했다. 여기에는 Neheim-Hüsten의 Gebr. Cosack(Cosack Bros)사를 위한 등(현수등)디자인, Gelsenkirchen의 Wilfang회사를 의한 촛대디자인, Solingen의 Pott사를 위한 테이블 소품과 식사용구Cutlery 디자인등 있었다 포트사를 위한 식사용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제품화되었다. 
. 그는 시계디자인에도 많은 관심을 두었다. 베커가 종이손수건 케이스dispenser와 부인들의 안경집을 디자인 할 때 그는 세공가로서의 위치에서 많이 벗어나있었다. 그는 이와 같은 계속된 주문을 거부하기로 했다. 학교 교육에서는 이 디자인 작업을 계속 다루었으나 그 자신의 작업에서는 세공작업에 다시 집중하기로 했다. 

베커는 생애동안 세공가로서의 그의 직업을 잘 알았다. 그가 최고의 성공을 특히 그의 초기경력에서 이룬 것도 이 분야다. 1958년 뒤셀도르프 시장을 위한 Chain of Office (1958) 시장의 신분을 상징하는 귀금속으로 제작된 목걸이 체인과 메달. 훈장과 같이 공식석상에서 착용한다.
는 베커를 밤 사이에 유명하게 만들었고 그에게 ‘시의 세공가 city goldsmith'라는 호칭을 부여했다.(도2) 뒤셀도르프시로부터 Ehrenring(Ring of Honour)의 커미션도 있었는데, 1965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를 위해 제작한 것도 있다. 
베커는 또한 은기물 공예가silversmith로도 알려졌다. 전술한 많은 교회성물을 제작했으며 58년에는 은 종Die Silberne Tischglocke(The Silver handbell) 공모전에서 2등상을, 2년 후에는 은 촛대Der Silberne Leuchter(The silver candlestick) 공모전에서 1등상을 수여했다. 

베커는 1961년 이후 명성을 얻었으며 66년의 런던에서의 개인전은 큰 분수령이 되었다. 그는 1961년 런던의 골드스미스홀 Goldsminths' Hall 수세기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영국세공가협회The Worshipful Company of Goldsmiths의 본부로서 런던에 독립건물을 가지고 있다. 국제적인 전시회와 행사를 개최, 진흥하며 Craft Council과 함께 대표적인 금속공예 진흥단체라고 할수 있다. 
에서 개최되었던 전설적인 전시회였던 ‘International Jewellery 1890-1961’에 출품했다. 여기서 그는 함께 전시되었던 장신구사에서의 거물들 파버제Faberg, 푸케Fouquet, 라릭Lalique, 스러츠키Slutzky, 템프리어Templier, 티파니Tiffany등과 아르프Arp, 콜더Calder, 쟈코메티Giacometti, 폰타나Fontana, 피카소Picasso등의 작품들을 보게 된다. 베커와 링케Hadfried Rinke, 보데Nele Bode는 독일의 젊은 출품자였다. 
당시 전시감독이었던 휴스Graham Hughes는 베커의 재능을 발견하고 이후 계속 알렸으며 그의 작품은 골드스미스 홀에서의 전시회에 추천되었다. 66년 스위스의 알버트Gilbert Albert와 이태리의 마프티나찌Bruno Martinazzi에 이어 그는 영국 금속공예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이 곳에서 첫 독일인으로 개인전을 갖는다. 이러한 영광은 1965년의 North Rhine Westphalia State Prize of Art and Crafts 수상과 함께 그의 세공가로서의 명성을 더욱 굳혔다. 

1971년전 그는 뉴렌베르크에서 뒤러Albrecht Dürer를 기념해 기획된 전시회였던 Gold & Silver Jewellery and Device 전에 여러 키네틱 장신구를 출품했다. 또한 높이 2.7m의 대형 모빌 조각도 출품했다. 이를 두고 ‘남독일 신문Suddeutsche Zeitung’의 Erich Pfeiffer-Belli는 ‘기술적인 예술작품과 잘 고안된 장난감이 하나로 합쳐진 것 같다’ 고 했다. 
이것은 전시회의 큰 구경거리가 되었으며 전시 종료 후 뉴렌베르크시에서 Norischalle를 위해 구입했다. Norischalle의 Curt Heigl은 1985년 베커와 뒤러Dürer와 충분한 연관성이 있다고 기술한바 있다. 뒤러Albrecht Dürer(1471-1528)는 독일의 화가, 판화가로 예민한 사실력과 풍부한 예술성으로 종교화, 초상화, 풍경화, 동식물화 등 넓은 범위에서 활약. 독일 르네상스 회화를 완성, 판화에 있어서 미술사상 최대의 작가라 불린다. 
그것은 두 사람 모두 예술적 재능의 다양성이라는 점 때문에 단순하게 분류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이다.

1972년 베커는 Ehrenring (Ring of Honour)상을 하나우에서 독일 세공가협회 Deutsch Gesellschaft für Goldschmiedekunst로부터 1972년 받았을 때 그는 막 50살이었다. 국제적으로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세공가로서 알려졌을 때다. 전통에 따라 그는 전 수상자들인 Franz Rickert, Elisabeth Treskow, Sigurd Persson, Max Rröhlich, Herman Jünger들에 의해 선출되었다. 이 수상을 기념해 같은 1968-72의 작품을 보여주는 개인전이 하나우 ‘세공가의 집’ Goldschmiedhaus. 독일 하나우Hanau에 있는 금속공예센타이며 미술관이다. 지금 도 금속공예, 장신구의 가장 권위있는 국내 국제 행사를 기획 전시하고 있다. 
에서 열렸다.
같은 해 간행된 Gerhart Bott와 Reinhold Reiling의 ‘Jewellery'라는 책에 전통적 장신구와 강한 대비를 보여주는 베커의 키네틱 부로치 두 점이 소개되었다. 이들 작업은 제작 상에서도 캐주얼한 스케치 작업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으로 구조적 완성을 위한 도면을 통한 조직적인 작업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1973년 베커는 뒤셀도르프 기술대학의 정교수professor로 임명되며 1982년 은퇴할때까지 교육을 담당한다. 
그의 친구들 중에는 그의 스승이고도 했던 Karl Schollmayer, Graham Hughes, Hermann Junger등이 있다. 윙어와는 장업에서의 많은 상이성에도 불구하고 많은 지적 교류를 가졌다. 둘은 지난 50년 동안 독일의 장신구 작가로 가장 영향력 있었으며 두 유명 학교의 리더였다. 성공한 그의 제자 혹은 같이 일을 했던 이들로는 --Peter and Maria Hassenpflug, Franz Josef Bette, Ingeborg Bornhofen, Werner Bünck, Herbert Schulze, Günter Wermekes 등이 있다.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의 유럽장신구계의 큰 변혁기에 베커는 윙어와 함께 젊은 세대의 존경을 언제나 받았다. 그는 끊임없는 아이디어의 자산을 가졌으며 기술은 따를 자가 없었다. 
베커는 1997년 그의 마지막 전시회를 기획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그가 죽기 얼마전 런던의 왕립미술학교 Royal College of Art. 1837년 College of Art in London으로 개교. 1896년부터 현재 이름으로 개칭. 
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그에게 위안이었다. 그러나 자신도 끝내 알지 못했던 사실은 왕립미술학교의 160년 역사 동안 세공가로서 이 학위를 수여받은 사람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Ⅳ. 작품세계

1. 장신구 미학
1959년 뮨혠 공예 페어에 반지들을 출품했던 베커는 강한 비판을 받았다. 출품작 10개 중 8개가 심사위원들에게 거부되었고 비교적 일반적인 작업이라 할 수 있는 2개의 구 반지ball ring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선택된 두 개 중 하나는 이차 심사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되어 바바리안주 상 Bavarian State Prize를 수상했다. 베커는 이 일을 1959년 Goldschmiede Zeitung지에 기사화했다. 그는 모든 낙선작들이 그의 고객들에 의해 애용되며 착용되고 있으며 이것은 뒤셀도르프의 여자들이 심사위원들보다 현대 미술에 대해 더 긍정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고 했다. 

그의 반지들은 기능적이고 구조적이다. ‘곡선하나, 각角 하나도 장식적이지 않고 기능을 가지고 있다. 만약 당신이 원한다면 이것을 조직construction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들은 그 자체가 장식적인 것이 아니라 착용되었을 때 비로소 장식적인 것이 된다.’ Joppien, 전의 글, 20쪽
라고 그는 말했다. 그가 추구한 것은 장식과 기능의 동시성이며, 장식을 위한 장식을 거부했다. 그의 수상작인 반지(1958)는 좋은 예다. 8자형의 뚫린 상부 공간으로 보석을 셋팅함으로써 전통의 세팅에 요구되었던 난발이나 보조대등을 생략한다. 금속세공가였지만 또한 기술자로서 베커는 최소한의 형태로 기능적인 해결방식을 찾곤 했다. (도3)
기술적인이며 공학적인, 그리고 예술적이며 장식적인, 이 두 측면의 종합은 베커가 생애를 통해 추구했다. 그것은 기능적인 실용성과 장식사이의, 그리고 기술적 정교함과 감각적인 느낌 사이의 간극을 없앴다는 점이다. 특히 이러한 작업관은 그가 숄마이어 밑에서 공부할 때 혹은 후에 교수로서의 초기 몇 년동안 구축되었다고 한다.


베커의 키네틱작품은 대중들을 매료시켰던 부분이다. 그러나 베커의 활동을 키네틱 작업으로만 평하는 것은 잘못이다. 키네틱 외의 장신구작업들, 성물과 일반 기물을 다양하게 제작한 금속공예가로서, 그리고 조각가, 디자이너로서의 그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장신구 작가로서 그는 키네틱과 동일하게 정적인 형태에 깊은 관심을가졌다. 장신구 조형에서 베커는 원형적原形的인archetypal 단순성으로 환원할 줄 알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미니멀리즘의 중심은 반지다.
베커는 수십년 동안 반지에 집착한 20세기 후반의 소수 작가 중 하나이다. 500개 이상의 반지 모델을 디자인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가장 개인적인 장신구로서, 개인적 메시지, 사회적 신분, 권력, 사랑을 상징했던 반지는 소재에서 풀잎, 동물털 등의 자연재를 사용했으나 후기에는 뿔, 뼈, 돌에 이어 금속을 사용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반지는 다른 어떤 악세사리와 달리 패션의 변화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전개되어 왔다. 20세기에 들어서 반지는 변한다. 자유로운 표현의 매체로서 특히 2차대전 이후 그러하다. 베커는 이들 변화를 이끈 사람 중 하나로 반지의 조형에서 ‘기능적 미학’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50년 후반으로 가면서 베커는 탄성을 이용한 세팅spring-clipped stone setting과 금으로 제작된 반지조각ring sculpture들을 발전시켰다. 반지(1957)은 좋은 예다. (도4) 이은 돌을 바꾸어낄 수 있는 작은 미니어춰 조각, 혹은 장난감의 이미지를 가졌다. 그러나 1959년의 반지(도5) 의 예와 같이 한 형태 한 볼륨으로 이루어진 조각적인 형태들도 있다. 
그는 점점 더 삼차원적인 공간적 효과에 흥미를 가졌다. 반지 위부분이 수평의 기하학적 교량 같은 바 형태 혹은 원통도 있다. 자주 두 개의 완벽히 동일한 기하형태를 반지 위 부분에 배치함으로써 반지를 두사람 결합의 상징으로 표현했다. 같은 크기의 두 요소의 상호작용은 후에 키네틱 장신구의 주요 요소가 된다. 
여러 두께의 구부러진 튜브들을 이용해 만든 두 개, 세 개 혹은 네 개의 손가락을 위한 반지들은 70년대 말의 금 반지 조각에서 다시 이어진다. 

1962년부터 백금 White gold, 흰색을 띠도록 합금한 금75%의 합금. 플라티늄platinum과 다르다. 
소재로 팔찌와 반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미 15년 동안 금장신구를 만든 후 였다. 백금의 차거운 광택 속에서 그는 냉정함과 초연함을 표현할 수 있었다. 스프링 형태의 1964년의 팔지는 좋은 예다. 단조로 제작된 이 형태의 단면은 외곽으로 갈수록 얇아진다. 마치 무딘 칼날과 같다. 다이아몬드 세팅은 가장 간결하며 이 보석에 최대의 빛을 주는 창의적인 디자인이다.(도5)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에 다시 백금으로 반지와 팔찌를 만든다. 이것은 링의 외부 혹은 내부면에 다이아를 세팅한 것이다. 1982년의 팔찌와 같이 특히 내부에 세팅한 것은 놀랍다. 두 층의 원에 세팅하고 이음새가 깨끗하게 연마된 이 세팅 방식은 새로운 발명이라고 할 수 있다.(도6)
베커는 제작상의 우연적 효과를 싫어한다. 작업과정에서 오는 어떤 자국이나 불규칙성도 남기지 않는다. 그는 아르데코의 프랑스 세공에서의 정교성을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뒤셀도르프의 세공가 Bene Kern의 초기작업을 높이 평가하는데 그와는 자주 심사위원으로 접했다고 한다.


작품에서의 정적인 것과 움직이는 요소, 큰 것과 작은 형태, 장신구와 은기 등등의 대비적 요소를 선호했다. 이는 재료 사용에서도 나타난다. 금, 백금, 보석을 사용했는가 하면 60년대 중반부터는 스텐, 합성 인조보석을 다루었다. 그는 Idar Oberstein에 있는 Groh & Ripp사로 하여금 각 디자인이 요구하는 커팅 형태들을 합성재료들로부터 연마하도록 했다. 

베커는 모든 종류의 돌들을 애용했다. 보석에 매료되었던 것 만큼 그동안 가치없다고 생각하던 돌들도 사용했으며 새로운 커팅 방법을 끊임없이 고안했다. 혁신적인 다이아몬드 커팅 디자인도 있다. 그는 스위스로부터 제작된 인조보석들을 현대의 발명품이라고 했으며 따라서 이의 사용은 정당하다고 했다. 그들은 이전보다도 강렬한 광채가 있는 색을 가졌으며 자연석에서는 불가능한 특이한 형태와 크기를 가능케 한다고 생각했다. 이 합성석과 조화를 이루는 금속은 더 이상 금과 은이 될 필요가 없었다.
또 다른 현대의 재료는 스테인리스 스틸이었다. 1966년작의 성작과 성체현시체는 첫 번째의 스테인리스 스틸 작품으로 인공루비로 장식되었다. 이것은 66년의 영국 골드스미스홀 전을 위해 제작되었는데 아마 영국의 금은 세공의 보수성을 생각할 때 얼마나 혁신적인 발표였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도7)

1972년 베커는 Ehrenring (Ring of Honour)상을 하나우에서 독일 세공가협회 Deutsch Gesellschaft für Goldschmiedekunst로부터 받았다. 당시 베커가 보여준 공예적 성취는 의심할 여지없는 최상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이제부터 세공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장신구는 이제 기술자들과 정밀 엔지니어들에게 넘겨주어야 하나? 그의 작품들에 담겨진 차가운 수학적 합리성은 보통 장신구와 연관되었던 유기적이고 육감적인 느낌과는 결별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4년전 헤르만 윙어가 수상했을 때와 같이 베커의 수상은 장신구 제작에서의 전통과이 결별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사회적 힘들은 변혁에 초점이 맞추어졌으며 세대 교체와 새로운 주제에 대한 요구가 있었던 것이다. 
베커의 동료인 빈 출신의 Peter Skubic은 73년 포르츠하임에서의 Tendenzen(Trends)전에 출품된 베커의 인공 루비와 스텐으로 제작된 브로치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편지에 쓴 적이 있었다. 
‘이것이 나에게 중요한 이유는 우리 시대의 지적 사고와 창의력을 보여주는 이 재료를 선택함으로써 자연적으로 사용 가능한 재료를 의도적으로 거부한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새로운 작업 방식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하나의 장신구는, 음악, 문학, 그리고 미술의 경향에서 그러하듯이 단지 존재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전달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 충분한 것이다.’ Joppien, 전의 글, 28쪽


80년부터 보석 없는 스텐 장신구들이 제작되었다. 베커의 장식 언어는 더욱 미니멀해졌다. 반지들을 단순한 8각형으로, 사각형으로, 호弧형으로 단순화시켰다. 단지 각형의 구석공간에 ‘계단’형태를 덧붙여 장식같이 보이게 했다. 그러나 사실 이들은 손가락에 잘 맞게 하기위한 고안이다. 82년의 반지는 좋은 예다. (도8)
형태는 메시지의 전달이나 장식이 아닌 자체의 순수한 이미지를 갖는다. 모든 것이 기하형태이며 자연적인 텍스취는 없다. 그러나 작업에서의 정확한 기술과 예민한 감성의 조화, 아름다운 비례는 냉정한 형태위에 묘한 환상과 여성성 femininity를 부여하기도 한다. 


2. 가변적 장신구variable jewellery
보트Gerhard Bott는 베커를 가르켜 ’장신구 공학자‘이며 그의 디자인들은 기계제작을 위한 도면들과 흡사하다는 말을 했다. 장신구의 드로윙들은 치밀한 제작과정을 설명하고 있으며, 언제나 칫수로 잴 수 있고 기록할 수 있고 복제할 수 있다.
장식이 아닌 새로운 고안이 베커에게는 가장 중요했다. 베커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것도 공예가로서의 능력과 공학적인 기술과의 결합이다. 그는 기술자였으며 지칠줄 모르는 발명가였다. 경력의 백미는 ‘키네틱 장신구’일 것이다. 그리고 키네틱 장신구의 초기 작업, 혹은 발단으로서 ‘가변적장신구 Variable Jewellery'는 그 자체로서 매우 흥미있다.
가변적 장신구 - 착용자가 의도에 따라 장신구의 모습을 바꿀수 있는 개념은 윙어 Herman Junger와 지우바Gabriele Dziuba 등과 같은 전후 일부 작가들에 의해 이미 시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작업에서의 가변성은 여러부분으로 된 장신구를 어떻게 착용하느냐에 따른 변화였다. 이에 비한다면 베커의 장신구는 그 독창성에서 차원을 달리한다 
그의 세공가로서의 훈련의 마지막 해인 1948년 그는 이미 조정할 수 있는 스프링 코일과 접는 장치가 있는 펜단트 혹은 돌아가는 보석이 있는 반지 등을 디자인했다. 그러나 이들은 선생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이 아이디어를 잠시 묻어두어야 했다. 

거의 15년 후 기능적인 발명품 하나가 다시 가변 장신구로 그를 이끌었다. 1962년의 Diamond Seller라는 작품이었다. 이것은 다이아몬드의 크기를 재는 기능적인 도구였다. 다이아몬드 번호에 익숙하지 않은 고객들에게 돌의 크기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가게에서 지금도 사용된다. 끝에 인조 흰색 스피넬 0.1-2.0 캐러트를 세팅한 것으로 부채와 같이 접히는 것이다. (도9)
‘이 고안품의 기능과 아름다움이 나에게 가변적 장신구의 아이디어를 주었다.’ 이것은 가변장신구이 레디메이드 프로토타입이 된 것이다. ‘나는 순수형태와 구조에서의 아름다움을 찾는다’, ‘아름다움, 기능, 형태의 절제가 내 작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베커는 말한다. Arnold, 전의 글, 60쪽


1956년의 Two-way Ring는 가변장신구의 전조가 된다. 끼우는 방향에 따라 위의 보석이 손가락과 나란히 배치되기도 하고 수직으로 배치되기도 하는 것이다(도10). 베커의 스승인 숄마이어는 ‘two-way ring'을 막스 빌과 헨리무어의 조각과의 연관시키면서 이는 베커의 당시 유럽의 미술에 대한 이해를 시사한다고 했다. 양식상의 그리고 기술적인 유사성을 미루어 볼 때 베커는 이미 페르손Sigurd Persson이나 뵉스트룀Björn Weckström과 같은 스칸디나비아 세공가들의 작업들도 이미 알았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기능적 구조로서 보석을 갈아 끼울 수 있는 베커의 반지는 가변장신구의 전신이 된다. 단순히 보석을 반지로 조인 것으로 바꿀 수 있고 링은 동시에 세팅 방식이 되고 있다. 보석은 반지의 연장이 된다.(도4) 이것은 미적으로, 지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아이디어다. ‘마치 제대로 된 건축에서처럼 장식은 통합된 구조의 일부로서 나타난다. 이는 대표적인 모더니즘, 바우하우스의 영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모더니즘의 구호인 Form Follows Function 과도 일치한다. 미국의 건축가인 Louis H. Sullivan이 한 말이다. Arnold, 전의 글, 60쪽에서 재인용

첫 번째의 모빌 핀이 달린 장신구pin-on jewellery는 아홉 개의 금판 위에 각면 커팅한 루비가 박힌 1962년의 브로치다. 이들은 중심축으로 연결되어 포개지거나 구름 모양으로 퍼진다. 1974의 하노버페어를 위한 분수는 이의 조각으로의 확대라고 할 수 있다. (도11, 도33) 
1976년의 가변 브로치는 삼각형, 사각형, 팔각형과 변형형태의 금 막대로 구성된다. 6개의 조인트에는 다이아 세팅이 마치 스크루 같다. 이것은 기계적 이미지를 더 강조함으로써 10년전의 오팔을 사용한 1965년의 가변 브로치와 비교할 때 훨씬 미니멀한 자세를 보여준다. (도12)
백금으로 제작된 1963년의 가변 펜단트를 만든다. 이것의 기본 구조는 가위와 같다. 조금 더 발전된 것이 1980년에 제작한 목걸이다. 이것은 더 조직적이고 더 기술적으로 보인다. 그것은 스테인리스 스틸 형태들이 평면이기때문이며 마치 특이한 도구처럼 보인다.(도13, 도14)
60년대의 가변장신구는 둥글고 덜 염격하다. 이후의 것들은 더 평면이 되면 표면질감이 중요시 된다. 65년과 77년에 제작된 두 장신구가 이를 잘 보여준다. 백금과 다이나몬드, 에메랄드, 사파이어로 구성된 65년의 펜단트는 여전히 장신구쳐럼 보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백금과 피봇 부분에 라피스를 사용한 77년의 장신구는 냉정한 디자인으로 완전히 다른 느낌을 준다. 회전할 수 있는 원판은 양면에 라피스와 광택이 있는 오목의 은판으로 이것은 자체가 앞뒤로 돌릴 수 있으므로 많은 경우수의 콤포지션을 만든다. (도15, 도16)
이들 가변장신구속의 흥미있는 주제들은 키네틱 주어리로 나아가는 과정이 되었다. 베커의 가변장신구는 변화무쌍함에도 불구하고 착용자의 의지를 필요로 한다. 착용자가 적극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키네틱 장신구가 해결한다. 이 변화를 요구하는 착용자의 의지가 없더라도 착용자의 움직임만 있다면 되는 것이다. 


3. 키네틱 장신구kinetic jewellery
베커는 목적없는 유희성을 사람의 기본적인 성향으로 본다. 버커는 호모루덴스 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 놀이성, 유희성을 인간이 가진 중요한 본성이며 특질로 보는 견해 
를 믿었다. 그는 사람의 창조성에 한번도 회의한 적이 없었다. 이 확신은 그를 좋은 교육자로 만들기도 했다. 
또한 그는 모든 것에 존재하는 움직임이라는 현상을 즐겼다. 그에게 세상은 무수한 복잡한 구조들과 조직들과 힘이 작용하는 거대한 기계로서 인식되었다. 이러한 믿음에 따르면, 오로지 세상에서 일정한 것은- 파라독스하게 -움직임이다. 
‘내 작업은 장식적인 것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유희의 즐거움과 관련된다.’ Beate Christiane Arnold, Kinetic Jewellery, Fridrich Becker-Schumuck, Kinetic, Object, Arnordsche, Stuttgart, 1997, 89쪽
놀이, 실험, 창안의 즐거움 그리고 기술적 지식 그리고 최고의 장인적 솜씨의 추구야 말로 그의 키네틱 아트를 만든 동인이다.‘ 그의 키테닉 아트는 그 자체가 유연하거나 튀는 물체, 또는 자롭게 매달려 착용자가 움직어면 따라서 흔들리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단순히 단성이 있거나 말리거나 떨리는 것과 상관이 없다. 

그는 자신의 키네틱장신구를 정의한다. ‘중심축과 일정한 무게와 힘을 가하는 프라티늄 볼을 가지고 수평 혹은 수직의 베어링에 의해 자유롭게 회전하는 요소들이 주가 된다. 이것은 착용자가 간헐적으로 움직일 때 이 운동력은 극대화되어 새로운 다양한 일련의 운동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Arnold, 앞의 글, 89쪽
신체움직이라는 자연적 동인을 사용하며 동력장치는 없다. 그는 사람의 몸이 만드는 잠재적 동력을 읽고 이를 이용하고자 한 것이다. 
1964년부터 죽을 때까지 베커는 30년 이상 키네틱kinetic 장신구를 제작했다. 누구도 따를 수 없었던 전통적이지 않은 이 작업을 하게 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그가 항공 기술자로서 훈련받았다는 사실이 하나의 설명이 된다. 수학과 물리학에 대한 그의 훈련과 지식도 중요하다, 그러나 학생시절과 그의 첫 번째 키네틱 작업들 사이에는 20년 이상의 시간차가 있는 것을 본다면 여전히 불분명하다. 
아마 60년대 초 일종의 새로운 조형형식으로서의 키네틱에 대한 그의 관심이 주된 이유라고 추측된다. 이것은 물론 다양한 장신구들을 이미 수년동안 제작하고 난 후의 일이다. 그때 장신구 중 일부는 착용자가 모습을 바꿀수 있는 가변적인 것들 이었다. 키네틱에 대한 컨셉은 천천히 구체화되었다.
베커는 뒤셀도르프의 ZERO 그룹과 그들의 작업을 개인적으로 알았다. 그러나 그가 키네틱에 관해 영향을 받은 것은 콜더Alexander Calder와 리키George Rickey 그리고 누구보다 쇠퍼Nicholas Schöffer였다. 그는 쇠퍼의 작품에 매료되었다. 작업의 기계적이고 기술적인 성향과 정교한 작업은 그의 작업에서도 잘 나타난다. 
1966년의 런던 골드스미스혹에서의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베커는 키네틱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기로 한 것 같다. 키네틱 장신구는 착용자의 움직임을 요구한다. 장신구야 말로 사람이 착용하고 움직이는 특성으로 인해 키네틱의 요소가 가장 효과를 발휘될 수 있다. 이들은 보로치와 같이 몸에 부착한 것보다는 사람의 움직임에 더 영향을 받는 반지와 팔찌에서 더 효과적이다. 
1964년 첫 키네틱 장신구를 만드는데 장신구사에서 이는 유례가 없다. 그에게 '키네틱 장신구의 창시자‘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키네틱의 아이디어는 특히 50년대의 미술계에서의 4차원의 요소로서의 움직임의 도입에서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초기의 작품들(키네틱)은 시각적 일루전 효과를 만드는 움직임를 자주 다루었다. 눈이 지각하는 형태의 구체성보다는 일루전이 강조되는 모빌 브로치들은 옵 아트에서의 실험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1968년 이후 베커는 이 반지와 팔지 형식의 키네틱 장신구에 더 집중했다. 1965-72년 사이의 그의 작업들을 보면 하나하나의 작업 속에 새로운 원리의 움직임이 실험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대부분 모델은 단 한번 제작되었다. 오직 고객이 원하는 경우에만 복제품을 만들었다. 작품들이 모두 유일한 것이라는 점이 그의 창작적 도전이기도 했다. 외형적으로 유사한 변형물variation도 모든 메카니즘의 새로운 작업과 함께 이루어진다. 보통 세공가들의 작업처럼 약간의 장식적인 변화를 가한 시리즈와 같은 것은 없다. 그는 또한 키네틱 오브제와 조각과 같이 큰 작업에 무브먼트를 사용하는데 큰 관심을 가졌다. 작은 것들은 손으로 동력을 만들고 큰 것들은 전기동력을 필요로 한다.

첫 키네틱 작업은 1964년의 귀걸이다. 평행한 레일 위에서 바퀴가 도는 아이디어. 이와 같은 회전 바퀴의 주제는 후에도 자주 사용된다. 키네틱과 옵아트의 효과를 합께 보여준다. 이세한 망조직의 외형과 안에서 돌아가는 자전거 바퀴살과 같은 구조물의 회전축이 옵의 효과를 만든다.(도17) 수년동안 이 자전거 바퀴살 같은 주제는 중심적인 주제가 된다. 
1968년의 키네틱브로치에서는 여기에 보석을 결합한다. 다이아몬드와 루비가 만드는 두 원의 회전 구조는 완전히 노출된다.(도18) 1972년의 백금 브로치는 앞의 회전바퀴살 주제의 변형이다. 이번에는 바퀴살 대산 두 레일 위를 달리는 백금 원판을 사용한다. 비대칭 출의 설정으로 디스크는 위아래로 움직이며 회전한다.(도19)
충격을 더 가하기 위한 구(공)을 사용한 1968년의 키네틱 브로치는 원형형태에 다이아와 루비가 움직인다. 두 돌의 움직임의 궤도를 따라 오려낸 공간을 설정, 안쪽의 ‘충격 볼’은 중력에 의해 수평 바 위를 굴러다니면서 두 보석을 연결한 축을 건드리며 움직이도록 되어있다. (도20)
백금으로 제작된 1982년의 키네틱 팔찌는 타원형으로 회전하는 다이아몬드의 모습을 보여준다. 비슷한 아이디어지만 전혀 다른 메카니즘에 의해 회전한다. 그의 공학적 지식이 돋보이는 작업이다. 
1989년의 팔찌는 전면에 아크릴을 사용하여 안의 메카니즘을 모두 보여주는 디자인이다. 기어가 장착된 구조물 전체가 수평축을 중력에 의해 흘러다니면서 기어로 연결된 마치 달과 아몬드나무처럼 생긴 두 형태를 움직이는 메카니즘을 보여준다. 여러 개의 테프론 Teflon. 상표명. 열에 강한 합성수지
으로 씌운 볼 베어링이 자동차바퀴와 같이 장착된 것을 볼 수 있다. 회전하는 두 형태는 정확히 서로 외곽선을 접하면서 서로 충돌하는 일은 없다. 상대 형태의 외형을 타고 흐르는 것이다. (도21)
이것은 움직이는 형태의 일부를 여러 방법으로 변형시키 무게를 불균형하게 만들고 이 불균형한 힘이 동인動因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무게나 힘이 계산에서 수학적인 공식이나 계산법을 적용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많은 시도와 실패를 통해 얻는 것이다. ‘나의 과학은 경험적인 것이다.‘라고 베커는 말한 바 있다. Arnold, 앞의 글, 98쪽


베커는 스스로 결코 색의 세공가가 아니라고 했지만 66-69년 사이에는 색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유색석을 사용한 66년의 키네틱 브로치는 그가 어떻게 색을 그의 키네틱 효과를 위해 사용했는가를 보여준다. 반구속의 반사면에서 회전하는 두가지 색의 돌은 앞에서 드러나는 돌의 색과 반사되는 색이 강하게 대비되면서 회전의 운동감을 강조한다. (도22) 1996년의 두 손가락을 위한 반지도 색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예다. 녹옥수와 라피스라즐 리가 배색된 돌의 색상은 오히려 키네틱의 주제를 가리고 있다.
1966년의 키네틱 반지는 스텐과 인조석을 합성한 첫 번째 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원판의 일부를 깍아내 무게의 불균형을 이루도록 계산했다. 
바탕이 되는 방사대칭의 원판이나 형태는 워낙 완벽하게 만들어지고 회전하기 때문에 실제 보는 사람들이 이것이 회전하는 것은 거의 느끼지 옷한다. 위의 요소들이 독립적으로 회전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한번 기술의 완벽성 없이는 불가능한 아이디어 라고 할 수 있다. (도23) 

두 개의 8자 형태가 있는 69년의 키네틱 팔찌는 3월에 제작한 의 팔찌는 동년 포르츠하임 슈무크뮤지엄 주관 국제 공모전에서 2등상을 수상했다.(도24) 유사한 작업으로 동년에 제작한 녹옥수와 철광석의 두 볼을 올려놓은 69년의 키네틱 팔찌는 두 개의 돌이 8자로 궤적을 그리면서 도는 팔찌이다. 유성기어planetary gear를 이용한 작업도 70년대부터 도입되었다. 1979년의 팔찌를 보면 콘 형태 주위를 도는 두 개의 구는 마치 지구를 도는 달과 같이 위성의 궤도를 그리며 불규칙하게 원판 위를 돌게 된다. 
1988년의 ‘키리코에게 경의를’이라는 제목이 붙은 키네틱팔찌는 원판위의 아치들이 키리코의 초현실주의 그림에 나타나는 건축물과 같은 이미지를 준다. 내부의 정교한 회전장치는 6개의 다이어가 각기 독립적인 궤적을 그리도록 고안되었으며 이들은 아치를 통과하는 궤적의 홈을 따라 동시에 움직이게 된다. 이때 아치의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궤적에 의한 따낸 6개이 섬과 같은 형태를 지지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구조의 일부로서 작용한다. (도25)
97년의 두 손가락을 위한 반지(150)는 새로운 다시 새로운 메카니즘을 보여준다. 반지 위이 튜브형태 안쪽을 따라 도는 다이아세팅의 구형은 마치 무중력의 공간을 부유하는 공과 같은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도26)


4. 키네틱 조각 kinetic sculpture
베커는 1971년부터 96년까지 큰 스케일의 키네틱 조각을 다양하게 제작했으나 가장 덜 알려졌으며 생애동안 충분히 평가되고 거론되지 못했다. 그는 대중들에게 놀라움과 기쁨을 선사하고 싶어했으며, 또한 큰 것과 작은 것에 함께 대처할 수 있는 예술가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마치 중세의 뒤러Albrecht Dürer나 첼리니Benvenuto Cellini에게서 본 것 같은 능력을 의미했다. 키네틱 작가로서의 그는 장신구에만 머물지 않고 손을 위한, 벽을 위한, 야외의 조각들과 데스크 모델 등을 수없이 만들었다. 그러나 이들만을 위한 전시회를 개최한 적은 없었다. 

베커는 60년대부터 조각을 시도했다. 1969년의 파동치는 키네틱 조각은 파동치는 운동 주제의 첫 조각이다. 2.7m 높이의 네 개의 모터의 의해 움직이는 파동치는 옵티컬한 효과를 보여준다. 크롬도금의 황동 봉과 구로 구성되었다. 
뒤셀도르프 소재의 알프레드뒤러학교 내부에 설치된 1978년 작 ‘파동치는 키네틱 조각’은 22미터 높이의 천장에 매달린 작업으로 압도적이다. 모터에 의해 자연스럽고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알미늄과 폴리아미드로 이루어진 작업이다. 로드첸코나 만레이등의 구성주의 작업들이 연상된다. 위의 모터는 돌다가 서기도 하고 반대로도 돌면서 불규칙하고 자연스런 움직임을 연출한다. (도27)
1986년의 진자侲子가 있는 키네틱 조각은 뒤셀도르프의 페어 WIRE 19을 위해 뒤셀도르프 박람회장에 설치된 것이다. 거대한 뱀과 같은 운동감을 갖는 구조물로서 페어의 주제에 맞추어 선wire으로 이루어진 구조물은 진동하면서 움직임을 보여준다.(도28)
1965년에 제작한 바퀴살을 가진 키네틱 휘일kinetic Wheel로부터 영향을 받아 처음으로 1966년의 키네틱 장신구를 만든다. 기본적으로 같은 원리의 평행축을 달리는 구조라 할 수 있다. (도29)
이러한 바퀴살 주제는 두 개의 대형작품에서 다시 나타난다.1972년의 벽을 위한 키네틱 작업은 두 개의 스테인리스 바퀴가 상호 반대방향을 돌면서 환상적인 무아레 효과를 연출하는 작품이다. 이 효과는 광택이 있는 스텐을 배경으로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다시 이 주제는 뒤셀도르프의 야외조각인 1976년의 키네틱 휘일에서 유색의 효과와 함께 나타난다. 노랑색과 진한 오렌지 색은 바퀴살의 운동감을 강조하고 있다.(도30)
디자인에서의 색의 합성은 1968년 Hanover 페어를 위해 주문작으로 만들었던 거울반구가 있는 키네틱에서 나타난다. 이는 페어의 방문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작품이다. 철의 반구형상속에서 도는 이크릴릭 볼은 표면의 기하학적 옵의 패던을 반구의 면에 반사시키면서 회전한다. 도는 동안의 거울면에서이 반사형태는 빛이 변화와 함께 함성되면서, 또한 돌아가는 속에 따라 환상적인 시지각적인 일루젼을 연출하게 된다. (도31) 이 작업은 1966년에 제작한 백금의 오목 거울과 다이아와 루비의 볼이 합성된 장신구와 흡사하다.(도22)
작업에서의 시지각적 효과는 좀더 발전하여 1971년에 아크릴 거울을 사용해 만든 Cinemagic 제목은 그의 아내 Hildergard Becker가 붙였다.
이라는 제목의 작업에서 환성적으로 응용된다. 각 오목공간의 반사면과 이 공간에 매달려 자유롭게 도는 네온아크릴릭의 여러 기하 형태들은 조명의 효과에 혼합되면서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형태와 색의 효과를 만든다. 이 효과는 이후 유행처럼 국제적으로 상업화되어 수많은 상업 공간에서 사용되었다. (도32)
하노보 페어를 위해 주문받은 1964년의 분수는 1962년에 제작된 가변장신구와 같다. 중심축에 비대칭으로 표개지면서 연결된 여러 층은 여러 형태로 손으로 회전될 수 있다. 관람자에 의해 형태가 변할수 있는 것이 키네틱이라고 말한 Hans Holz의 말을 연상할 수 있으며, 맨 위에서 흘러떨어지는 물은 광택나는 철의 표면을 타고 흐르면서 모올리 나기가 말한 가상의 입체공간virtual mass을 만들고 있다.(도33, 도11) 
1973년에 제작한 Hamburg의 분수는 양조협회의 주문에 의해 제작된 것이다. 36개의 광택나는 스테인리스 스틸 볼은 세 개의 기둥에 각각 12개의 볼이 붙어 기둥를 따라서 돌면서 위로부터의 물을 각기 다르게 떨어뜨리며 다양한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도34)
이들은 69년에 제작한 팔찌와 유사한 형식을 가지고 있어서 다시한번 그의 장신구와 대형작품과의 상호관련 성이 상호 유기적으로 장신구에서 조각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조각에서 장신구로 발전되면서 상호 유기적인 관련성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조각과 장신구 사이의 끊임없는 상호관계, 그리고 상호간의 아이디어의 교환은 베커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미술사적으로 이런 예는 없지 않았다. 화가와 조각가 중에는 피카소Piccaso, 에른Ernst, 키리코 Chirico, 브라크Braque, 아르프Arp, 마리솔Marisol, 에tm코바Escobar, 폰타나Lucio Fontana, 세자르Cesar, 마르망Arman, 리히텐슈타인Lichtenstein등이 있다.
키네틱아티스트로는 레이Man Ray, 콜더Calder 와 소토Jesus Raphael Soto, 그리고1968 그의 대형 작업을 장신구로 카피해 ‘Erectiles’나 'Pointiles'를 만들었던 베리Pol Bury, 1986 년 Fingernest를 만들었던 ZERO 그룹의 우엑커Günther Uecker등을 들수 있다. 
1968년작의 곡선의 키네틱 벽 조각은 그의 장신구에서도 나타나는 아몬드나무를 도는 달을 표현한 것다. 관람자는 정교한 작업으로인해 유성기어를 사용하여 바탕의 원판이 돈다는 사실이 쉽게 지각하지 못하므로 달이 요술처럼 도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단순하면서 서정적인 작품이다. 비슷한 주제의 작업이 Arnsberger Industrie und Handelskammer에 설치된 1987년의 곡선의 키네틱 조각이다. 25개의 흰색 엘리먼트에 맞물린 채 지그소 퍼즐과 같이 회전하는 작업이다.
1992년에는 포르츠하임에 키네틱 그림자 오브젝트Shadow-object를 제작한다. 4미터 높이로 태양열에 의해 작동하는 여러 개의 고광택의 원형판이 스펙터클한 효과를 만든다. 태양열에 의한 ‘그림자 작업’이라는 제목이 유머스럽다.(도35)

1970년에 제작된 키네틱 트로피 ‘Priz Jeunesse International’는 첫 번째 키네틱 핸드 오브제이다. 이는 Bayerischer Rundfunk and Unesco in Munich주관의 젊은 영화인에게 수여되는 상으로 이 트로피의 공모전에서 일등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아몬드나무와 달 주제가 다시 나타나는데 무게중심이 이동됨에 따라 나무와 달 형상의 두요소가 맞물려 움직인다.(도36) 비슷한 주제의 조각은 구형의 상부를 투명 아크릴로 볼록 렌즈와 같이 덮어 안쪽의 움직이는 형태의 이미지를 극대화한 작업이 1983년의 키네틱 핸드 오브젝트다. 
1989년에 제작된 키네틱 트로피 Veltins-Oscar for Cooking은 젊은 요리사들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투명의 아크릴 콘 속으로 지각되는, 회전하는 팔각 형태의별 디자인은 시각적 확대와 착시효과를 불러일으킨다.(도37)


Ⅴ. 결론

'엄격하고 평범한‘ 이라고 어떤 이들은 말한다. ’대위법적인, 흥분되게 차가운..‘이라고 어떤 이들은 말한다. 나는 결코 누구나를 위한 장신구를 만들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Joppien, 앞의 글, 14쪽에서 재인용

1997년에 타계한 프리드리히 베커는 전통적이며 장인적 세공기술과 공학적 지식을 성공적으로 결합하여 장신구의 세계에 새로운 지평을 제시했던 세공가였다. 또한 독자적인 키네틱 작업을 수행한 조각가였고 전후 1세대의 산업디자이너로서 창작세계와 사회를 연결시켰던 디자이너였으며 교육가였다. 
상징성, 서술성을 주 내용으로 하며 유기적 형태를 중심 언어로 사용하였던 20세기 중반까지의 서구 장신구의 전통에서, 60대부터 그가 제시한 장신구들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모더니즘의 기능 미학과 미니멀리즘, 즉물적 순수형태미, 기하형태와 기계적 구조미들이 그의 천재적인 수공기술의 의해 다양한 예로서 실체화되었던 것이다. 키네틱 장신구는 이들 작업의 백미였다. 
베커는 표현형식에서 상호 극단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장신구와 조각을 동시에 수행하며 양분야 모두에서 키네틱의 주제를 독특하게 연출했다. 그것은 50년대의 서양 미술에서 등장한 ‘개념’ 중심의 키네틱아트를 가장 구체적이며, 기능적이며, 친근한 방식으로 인간과 인체라는 실존적 공간에 적용한 예시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은 절제된 형상, 완전한 기계적 작동에 의한 시지각적 충격, 체험적 유희성을 함께 보여주는 뛰어난 환경조형물로서 남아있다. 
건축적 공간성, 움직임의 요소, 즉물적이며 사회적인 성격 등은 베커의 작업이 구성주의constructivism의 언어와 이념에 매우 근접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모든 작업 속에 공통적으로 스며있는 정묘함, 장식성, 유머 등은 그의 작업이 이념을 뛰어넘는 매우 공예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또한 보여준다. 
국제적 교류에도 불구하고 지엽적 성향의 서정주의와 유기적 형태를 압도적으로 선호하고 있는 한국의 장신구, 금속공예 작가들에게 베커의 작업은 가장 이질적인 모델이다. 이들 작업은 기계적이며 냉엄한 기하형태의 속에도 인간의 정신이 풍부하게 구현될 수 있다는 예시가 된다. 또한 기계적 구조와 과학적 지식이 수공예의 미학과 표현어휘 등과 풍부하고 효과적으로 결합될 수 있다는 모범적인 예를 제공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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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_______, "Kinetic Objects", Fridrich Becker-Schumuck, Kinetic, Object, Arnordsche, Stuttgart,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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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ppien, Rüdiger "Not everyone's jewellery- the goldsmith Fridich Becker", Fridrich Becker-Schumuck, Kinetic, Object, Arnordsche, Stuttgart,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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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ner, Ralph, Contemporary Jeweler, New York, Van Nostrand Reinhold Co. 1976
Weber, Christianne, Sivergestaltung, Müncher, Klinkhardt & Biermann, 1992
전용일, “Herman Jünger의 작품 세계”, 국민대학교 조형논총 18집, 서울, 국민대학교, 1999
______, “Sigurd Persson의 작품 세계”국민대학교 조형논총 16집, 서울, 국민대학교, 1997 




(조형논총 요약문)

Fridrich Becker의 작품 세계 
전용일/공예미술학과 부교수

Ⅰ. 서론
Ⅱ. 배경
Ⅲ. 생애와 활동
Ⅳ. 작품 세계
1. 장신구 미학
2. 가변장신구
3. 키네틱 장신구
4. 키네틱 조각
Ⅴ. 결론


1997년에 타계한 프리드리히 베커는 전통적이며 장인적 세공기술과 공학적 지식을 성공적으로 결합하여 장신구의 세계에 새로운 지평을 제시했던 세공가였다. 또한 독자적인 키네틱 작업을 수행한 조각가였고 전후 1세대의 산업디자이너로서 창작세계와 사회를 연결시켰던 디자이너였으며 교육가였다. 
상징성, 서술성을 주 내용으로 하며 유기적 형태를 중심 언어로 사용하였던 20세기 중반까지의 서구 장신구의 전통에서, 60대부터 그가 제시한 장신구들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모더니즘의 기능 미학과 미니멀리즘, 즉물적 순수형태미, 기하형태와 기계적 구조미들이 그의 천재적인 수공기술의 의해 다양한 예로서 실체화되었던 것이다. 키네틱 장신구는 이들 작업의 백미였다. 
베커는 표현형식에서 상호 극단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장신구와 조각을 동시에 수행하며 양분야 모두에서 키네틱의 주제를 독특하게 연출했다. 그것은 50년대의 서양 미술에서 등장한 ‘개념’ 중심의 키네틱아트를 가장 구체적이며, 기능적이며, 친근한 방식으로 인간과 인체라는 실존적 공간에 적용한 예시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은 절제된 형상, 완전한 기계적 작동에 의한 시지각적 충격, 체험적 유희성을 함께 보여주는 뛰어난 환경조형물로서 남아있다. 
건축적 공간성, 움직임의 요소, 즉물적이며 사회적인 성격 등은 베커의 작업이 구성주의constructivism의 언어와 이념에 매우 근접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모든 작업 속에 공통적으로 스며있는 정묘함, 장식성, 유머 등은 그의 작업이 이념을 뛰어넘는 매우 공예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또한 보여준다. 
국제적 교류에도 불구하고 지엽적 성향의 서정주의와 유기적 형태를 압도적으로 선호하고 있는 한국의 장신구, 금속공예 작가들에게 베커의 작업은 가장 이질적인 모델이다. 이들 작업은 기계적이며 냉엄한 기하형태의 속에도 인간의 정신이 풍부하게 구현될 수 있다는 예시가 된다. 또한 기계적 구조와 과학적 지식이 수공예의 미학과 표현어휘 등과 풍부하고 효과적으로 결합될 수 있다는 모범적인 예를 제공한다.



1997년에 타계한 프리드리히 베커는 전통적이며 장인적 세공기술과 공학적 지식을 성공적으로 결합하여 장신구의 세계에 새로운 지평을 제시했던 세공가였다. 또한 독자적인 키네틱 작업을 수행한 조각가였고 전후 1세대의 산업디자이너로서 창작세계와 사회를 연결시켰던 디자이너였으며 교육가였다. 



베커는 표현형식에서 상호 극단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장신구와 조각을 동시에 수행하며 양분야 모두에서 키네틱의 주제를 독특하게 연출했다. 그것은 50년대의 서양 미술에서 등장한 ‘개념’ 중심의 키네틱아트를 가장 구체적이며, 기능적이며, 친근한 방식으로 인간과 인체라는 실존적 공간에 적용한 예시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은 절제된 형상, 완전한 기계적 작동에 의한 시지각적 충격, 체험적 유희성을 함께 보여주는 뛰어난 환경조형물로서 남아있다. 
건축적 공간성, 움직임의 요소, 즉물적이며 사회적인 성격 등은 베커의 작업이 구성주의constructivism의 언어와 이념에 매우 근접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모든 작업 속에 공통적으로 스며있는 정묘함, 장식성, 유머 등은 그의 작업이 이념을 뛰어넘는 매우 공예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또한 보여준다. 

국제적 교류에도 불구하고 지엽적 성향의 서정주의와 유기적 형태를 압도적으로 선호하고 있는 한국의 장신구, 금속공예 작가들에게 베커의 작업은 가장 이질적인 모델이다. 이들 작업은 기계적이며 냉엄한 기하형태의 속에도 인간의 정신이 풍부하게 구현될 수 있다는 예시가 된다. 또한 기계적 구조와 과학적 지식이 수공예의 미학과 표현어휘 등과 풍부하고 효과적으로 결합될 수 있다는 모범적인 예를 제공한다.






















The Works of Fridrich Becker


Fridrich Becker(1922-1997) was a goldsmith who combined successfully traditional craftsmanship in metalwork and modern engineering technology. Through his inventive works he presented new horizon to the world of contemporary jewellery. He was also a sculpturor of kinetic objects and the one of the first generation pioneers in post war industrial design, as well as an influential instructor who connected personal artistic view and the living society. 

His jewellery was especially avangarde in terms of extemely geometric formal idioms which was opposite to organic form most contemporary jewelers were reling on in 60s-70s. Besides his superb craftsmanship, the works have shown modernistic ways of designing, minimal way of thinking, pure form, delicate moving structures. His kinetic jewellery is the best examples showing his total abilities. 

Becker's works is still unfamiliar to Korean metalsmith and jeweler who, despite the international relation, still show strong preferences to natural motives and biomorphic forms. The works might be very meaningful, for it could break the preconception which engineering oriented machine froms and structure could not deal with and represent human feeling and spiritual world.